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공부를 하려면 개인적으로 이 책이 출발이 되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사실로써 인지하기 전에 우리가 배운 역사들이 어떻게 기록되는가 부터 알아야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카는 이러한 부분을 선명하게 짚어 냅니다. 니체가 한 말과도 상통합니다. "세상에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니체.
제가 써 놓았던 리뷰 붙힙니다. 읽고 마는 것은 옵션입니다. 왜냐면 너무 기니까..^^
- E.H, Carr.
우선 아래 두 글을 읽어 보자.
카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는 과거의 경험, 곧 자기의 손이 미치는 한에 있어서의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합리적인 설명이나 해석에 적합하다고 인정되는 부분을 골라내고, 여기서 행동의 지침이 될 만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곧 인간의 정신은 관찰된 사실을 모아놓은 넝마자루를 이리저리 뒤져서 '부적절한 것'을 버리고 '적절한' 관찰된 사실들을 골라내고, 이어붙이고, 모양을 만들어서 마침내는 '지식'이라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누비이불을 만들어 낸다(책 154쪽)"
카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존스는 어떤 파티에서 보통때보다 과음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브레이크가 제대로 듣지 않는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앞이 도무지 안 보이는 막다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담배를 사려고 마침 길을 건너던 로빈슨을 치어 죽이고 말았다. 혼란이 수습된 다음 우리는 - 가령 경찰서 같은 데에- 모여서 이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 일은 운전한 사람이 반쯤 취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장난 브레이크 때문일까?....
또는 막다른 모퉁이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로빈슨이 담배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로빈슨은 길목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고, 치어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로빈슨의 담배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그의 사인이고, 이러한 원인을 무시한 조사는 시간 낭비이며 여기서 나온 결론도 모두 무의미하고 무익하다...."
카는 결국 역사란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위 예에서 본다면 가장 직접적이고 덩치가 큰 그것만을 역사가들이 고른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선택은 역사가들의 개인적 취향(이념과 사상 등)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역사를 만드는 작업 중 역사를 만드는 사람 즉, '역사가'들이라고 카는 말한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무수한 연쇄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것, 오직 그것만을 뽑아낸다. 여기서의 선택의 기준은 역사가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틀에 이러한 연쇄를 적합하게 만드는 역사가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요약을 인용하여 재설명 하자면,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에, 해석은 역사가 자신이 생존하고 있는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의 가치에 의존하고.... 역사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가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진실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카는 역사가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의 객관성'이라기보다는 '가치의 객관성'이라고 믿고 있다" 바로 이 말은 니체의 말 "이 세상에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다"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모든 역사와 사실들이 사실은 개인(역사가 등)이, 개인의 취향과 그들이 처한 환경(시대정신과 또는 권력의 압박, 음모 등)에 따라 만들어지고, 때로는 조작되었다면?
다시말해,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보고 듣고 배운 모든 역사들이 곧이 곧 대로라기 보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 말하자면, 단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 의한 어떤 "작품"이라고 본다면 그러한 것들을 아무 의심없이 그대로 믿어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역사가)은 사실이든 가치든 우수한 작품(역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할 것이다(했을 것이고, 현재도 하고 있다). 이것은 도무지 인정을 아니할 수없고, 대부분의 면에서 그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역사라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들 역사가들의 견해가 100% 일치되고 있지는 않기에 우리가 초,중,고 국사책에서 배운 역사(국사)라는 것은 단지 대다수의 공감을 얻어내는 그 이상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좁게는 국내에서 좌,우 그리고 보수와 진보 학자들간의 논쟁이며, 넓게는 일본이 노리는 독도, 중국이 작업중인 동북공정의 예가 적합할 것이다. 좁고 넓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장하는 것은 역사라는 하나의 실체, 사건, 사고를 놓고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명백이 다른 견해가 도출되고 있다는 점이며 그것을 놓고 반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하나의 역사적 실체를 놓고 그들 역사가들은 의견을 달리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의 주장은 무조건 의심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아닐 수도 있다는 어떤 전제, 이러한 진보적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혀진 사실을 그대로 믿고서 판단을 한다면 사실-믿음-판단이라는 순서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결과까지도 이미 정해져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실이 진짜 사실일지 끊임없이 재검증하고 재확인하는 과정, 이것이 진보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예로든 로빈슨의 죽음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아마도 운전자 존스의 과음일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하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음주외에도 브레이크 고장이나, 길모퉁이나, 로빈슨의 흡연 때문일수도 있는 것이다. 한 번더 강조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직접적이고 덩치가 큰 것만을 역사로서 인정했던 것이다. 다른 원인들도 충분히 인과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인물들.. 모두 제목으로만 기억하는 그 모든 것들을 떠올려 보라.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개척했다는 고구려 광개토 태왕시절.. 그 시절,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왜 광개토 태왕 뿐일까? 수많은 장군, 장수, 병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한 대륙을 정벌했다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광개토 태왕 아래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을 텐데 왜 내 머릿속에는 광개토 태왕 이란 말 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사료가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역사적 큰 이벤트에 대해서 오로지 한 인물만 기억되고 있는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올바른 역사를 기억하고 있냐는 물음에는 제대로 답을 못할것 같다. 그렇다고 제대로된 역사를 기억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지만..
그 밖에 수많은 사료들.. 삼국유사, 삼국사기, 한단고기 등등. 대략 모든 책들이 개인에 의해 저술되어 졌고, 김부식이나 일연 등이 개인의 선택과 당시 시대적 배경을 기본으로 책을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텐데(카의 논리에 따른 다면), 만일 이런 책들 즉, 개인적 성향이 강하고 특정 시대 말하자면, 정치적 배경의 힘이 많이 실린 그 책을 그 시대의 명백한 사실로써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왔고 현재 그렇게 알고 있다면 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강감찬의 키는 굉장히 작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용감했는가?
서희는 정말 요와 담판을 잘해서 강동 6주를 얻어냈는가?
세종대왕은 정말 인자한 왕이었는가?
영조는 사도세자를 정말 뒤주에 굶겨 죽였는가? 혹시 다른 이유로 죽은 것은 아닐까?
이순신은 정말 해전의 왕이었는가? 혹시 그 뒤에 우리가 모르는 제갈공명만한 책사가 있지는 않았을까?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은 정말 우리가 단순히 알고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철천지 원수 그 자체인가?
(이완용은 개인적으로 볼 때, 영화 한반도에서 총리역을 맡았던 문성근의 캐릭터와 비슷하다고 본다).
이러한 물음들은 가정에 불과하고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은 아니다. 다만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카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역사가들에 의한 만들어진 역사를 배워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다. 만들어지고, 어쩌면은 조작되었을수도 있을 그 역사들을..
물론 대부분이 사실일 것임에 미루어 짐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 그러한 염려는 떨쳐 버릴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드라마 대장금을 역사책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하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이 역시 역사 왜곡 논란이 심하지만, 카의 관점에 본다면(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드라마로써 작가의 상상력을 펼친 그 이상은 아니라고 본다. 작가는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가라면 분명 나름대로의 증거와 논리, 가능한한 많은 객관적인 사실로써 만들어야 겠지만, 드라마는 그 자체로 분야도 다르고 특성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과거는 그렇다 치자. 사실을 사실로써 남기기엔 인프라가 너무 부족했다 치자. 그러면 현재는 어떠한가. DVD에 구워 남기면 거의 반영구적이 되는 인프라가 갖추어진 현재는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가.
결론은, 내가 보기엔 문제가 더 많다. 인프라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들의 기득권이 문제이고 의식이 문제다. 왜 좌편향, 우편향 교과서 문제가 터져 나오겠는가? 왜 친일청산 문제가 지금에서 -사실 지금에서는 아니지만- 터져 나오겠는가? 지금도 역사는 왜곡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을 가진자 쪽으로 씌여지고 있는 것이다. 5년 마다.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 왜 자살했는가? 민주당/친노 말대로 정부-청와대-검찰의 압박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여당 말대로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인가? 그냥 개인적인 이유때문에 자살한 것인가? 아닌가?
하나의 주제를 놓고 그 이유는 180도 다르다. 만일 수십년 후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내용을 초중고 국사책에 실을 때 과연 어떤 내용으로 기술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 때의 초중고 학생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서거에 대해 어떤 내용으로 배울까?
5.18이나 4.19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고 기술되고 공표된지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만일 518이나 419가 민주화 운동이고, 혁명이란게 지금에 와서 사실이라면 왜 그 두 사건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인정되지 못했는가?
정치 권력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 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노예제도나 아동들의 착취, 남녀차별! 이 모든 것들이 그 옛날에는 우리가 지금 밥먹는 것과 똑 같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카의 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도 미래에는 충분히 또 바뀔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인데, 평화로운 이 기간도 긴 역사를 비추어서 생각해 본다면 정말 짧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노예제도라든지 남녀차별 등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과거 우리에게도 아무런 문제없이 존재했었다.
결국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의 말대로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인 것이다. 그 해석을 우리는 100% 사실인양 배워왔고, 대부분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가 배운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일 뿐이라고 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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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책에서 나온 용어, 사람, 이벤트 등을 따로 모았다.
역사철학.
<철학> 역사의 생성과 현실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역사의 성과와 발전을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철학.
30년전쟁 [三十年戰爭, Thirty Years' War]
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712.1.24~1786.8.17]
프로이센의 국왕(재위 1740~1786).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의 관계가 악화되자 영국 ·프랑스 간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7.31]
에스파냐의 수도사로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40년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 양성하고 회헌(會憲)을 만들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크롬웰 [Cromwell]
프랑스의 작가 V.위고의 5막 운문극(韻文劇).
펠로폰네소스전쟁 [Peloponnesian War]
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스파르타는 과두정치(寡頭政治)를 각각 대표한 폴리스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하였고, 각 폴리스 내부에서도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기번 [Edward Gibbon, 1737.5.8~1794.1.16]
18세기 영국의 역사가.《로마제국쇠망사》는 2세기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 1300년의 로마역사를 다룬 것으로, 로마사 중 가장 조직적이고 계몽적이다.《자서전》도 문학적 가치가 높다.
청교도혁명 [淸敎徒革命, Puritan Revolution]
1640∼1660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
영국의 절대주의는 튜더왕조 최후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치세 중에 이미 청교도의 국교회 비판이나 의회에서의 절대주의 비판 등이 있었지만, 당시의 절대주의는 별다른 파탄을 보이지 않고 다음의 스튜어트왕조로 넘어갔다. 그런데 제1대 왕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영국의 의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였다. 한편 국민측에서는 법률가 E.코크가 ‘법의 우월’을 주장함으로써,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제임스 1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양측의 충돌 장소로 되어 어수선하였다.
다음 왕 찰스 1세는 절대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였으며, 헌금과 공채(公債)를 강제해서, 응하지 않는 자를 투옥하였다. 또한 병사를 민가에 무료 숙박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까지 적용시켰다. 의회에서는 1628년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인민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권리청원’을 기초하여 왕에게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29년 의회가 해산되고, 왕은 40년까지 11년간이나 의회 없는 정치를 하여야만 하였다. 왕은 측근에 W.로드 대주교와 Th.W.스트래퍼드백(伯)을 두고 성실재판소(星室裁判所)와 고등종무관(高等宗務官) 재판소 등을 이용하여 청교도를 탄압하고, 의회 없이 수입을 얻기 위하여 국왕의 대권을 남용하였다. 그런데 왕은 장로파가 우월한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려 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자초하고, 전비를 얻기 위하여 40년 소위 장기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토크빌 [1805.7.29~1859.4.16]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정치가. 베르사유재판소 배석판사를 지냈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하였다. 영국에서 자유주의자와 교유하며 J.S.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의무장관을 역임하였다.
액턴 [1st Baron Acton of Aldenham, 1834.1.10~1902.6.19]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종교가.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무류성의 교의에 반대했다. 영국 하원, 상원의원,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역임했다.《영국 역사평론》 창간에 협력, 《케임브리지 근대사 총서》 기획에 관여했다.
네이미어 [Lewis Bernstein Namier, 1888.6~1960.8]
영국의 역사가. 유대계(系) 폴란드인(人)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1913년 영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저서 《조지 3세 즉위 때의 정치기구》(1929) 《미국 혁명기의 영국》(1930)에 의해 ‘네이미어 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치사 연구의 새 방법을 탄생시켰다. 만년에 《의회사》(1964)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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