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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더리더-베른하르트 슐링크




1. 나는 그때 쓴 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시라고 할 만한 게 못된다. 그 시절 나는 릴케와 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시인을 한꺼번에 닮고 싶어 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보면 우리가 그때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돟 다시 깨닫는다. 그 시가 여기 있다.

 

우리가 서로를 열면
너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는 나를 네게.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우리가 사라지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그러면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

<책 66쪽>

 

--> 그래서, 그러면 사랑은 곧 너? 사랑은 곧 너...

이것이 가장 사랑을 포괄하는 "정의"일까?

존레논의 수많은 사랑의 정의들을 포함하는..

 

-LOVE-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wanting to be loved

사랑은 진실한 것이에요.
진실한 것이 바로 사랑이죠.
사랑은 느끼는 것이에요.
사랑 받기 위해 갈구하는 게 사랑이죠.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reaching love
Love is asking to be loved

사랑은 감촉이죠.
감촉이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은 (서로에게) 향하는 것이에요.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사랑이죠.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we can be

사랑은 바로 당신, 당신과 나에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아는게 사랑이죠.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Love is needing to be loved

사랑은 자유에요.
자유가 바로 사랑이죠.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에요.
부족해서 사랑받으려는 것이 사랑이에요.

 

 

2. 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도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론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
<책 43쪽>


-- 모르고 산다는 것과 알고 산다는것.

모르고 살았다는 것과 이제사 알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고서 미래를 살아야 한다는 것.

이러한 경우의 수 안에 온갖 정답들이 난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생사다.

 

따라서, 결론은 정답은 없다다. 정답처럼 보이는 겉모습은 단지 사실을 은폐한 가장무도회.

그러면 진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 들키지 않게 해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오히려 행복일까.

 

 

3. 상실의 아픔을 가져올 만큼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책 95쪽>

 

 

4.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책 201쪽>


 

5. 책 153쪽의 재구성.
내가 주관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의 사실을 객관적으로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적용을 시켰을때 도움이 되거나 행복이 된다면, 그 받아들이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알리거나 적용시켜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할까? 다시 말해 그 사람은 그것을 밝히는 것을 어떠한 이유로도 싫어하지만, 내가 곧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렸을때 그 사람의 (심지어는) 목숨까지 구할수가 있다면 나는 알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정말 그 사람이, 지금은 비록 내 얘기를 듣기 싫어하고 짜증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기적으로는 정말 그 사람에 도움이 되고 행복을 안겨줄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듣는 그 사람에게 까지 욕과 멸시를 받아가면서까지(라도) 그 말을 해야/해 주어야 할까?


여기서의 가정은 이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은 99% 객관적으로 행복한 것이다. 즉,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면 행복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사람이 명백히 원하지 않는 다면?

예를 들었듯이 정말 목숨까지 잃어버릴 상황이라면?

말해야 하는가 하지 말해야 하는가.

 

책에서의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꼬마"라는 것. 꼬마들은 어떤 좋은 말을 그대로 수용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

결국은 좋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떤 "그릇(학식과 지위, 지식과 삶의 철학을 받아들일만 정도, 수준)"에 달렸다고 봐야 옳은 것인가.  꼬마들은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라고 말해줘도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사탕과 장난감"이다.

두 번재 관점.

그렇다면 성인이라고 해서 달라질까. 아무리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객관적으로 맞다고 말해주고, 이것을 알아야 궁극적으로 니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줘도 그들 역시 "그릇"이 안된다면?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품위와 자유가 있고, 우리 역시 그렇다.

어떤 "그릇"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때는 상대방의 고유한 자유와 품위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어떤 그릇이 우위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분적으로는 서열이 형성될 수 있을지 모르나,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모든 능력과 기술을 우위에 있는 사람이 말 그대로 다 우위에 있다 말할수 없는 것이다. 이는 모른 사람이 다 같이 똑같은 반열에 서 있을 수도 없는 것처럼, 그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모든면에서 모든사람을 다 뛰어 넘을 수는 없다.

 

행복과 자유와 품위.

행복과 자유와 품위는 다른 것들이라는 점.

상대방을 고려할 때 우선시 해야 할 것들 중 하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추구라는 것이 행복 그 자체는 몰라도 상대방의 자유와 품위까지는 다 껴안아서 다 같이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 말하자면, 그 경우의 수가 희박해서 따로 구분해서 논할 필요의 경우도 생긴다는 점.

내가 볼 때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람의 자유와 품위역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

사람의 사고는 이처럼 중요하다.

사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침략자! 약탈자!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사람과 동물들 이룩해 놓은 문화유산을 일거에 없앨수 있다.

비단, 이런 큰일에 대한 것 뿐이겠는가.

개인의 삶 안에서도 한 사람의 사고는 매우 중요하다.

생각은 정말 운명이기 때문이다.

 

"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