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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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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요즘 이 책이 서점가에서 돌풍이라고 하더군요. 현재까지 11만부가 팔렸답니다! 헐~ 무슨 소설도 아니고 말이죠. 
 이 책은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이 자신의 정치철학 강의 '정의(Justice)'를 책으로 엮었다고 하는데요. 아무튼 이유가 뭘까요? 이유가 뭐기에 이런 인문 서적이 2002년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1위를 한 이후 8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1위를 한 것일까요? 
저는 답을 비교적 간단한 이유에서 찾습니다. 바로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여기서 '했다'라고 쓴 이유는 현재형 보다는 과거형이 맞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볼 때 '정의'는 지금, 현재 필요한 것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시점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쉽게 말해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우리가 아니 이 사회가 '정의'가 필요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스스로 갈구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 합니다. 또는 '정의'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도 그렇다고 생각도 되구요. 이유의 다른 한편에서는, '정의'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실종되었다고 보는분들도 꽤 있으리라 판단합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면,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해 유명해 졌다고 하는 군요. 또한, 20여 년간 진행해온 이 '정의(justice)'라는 강의는 하버드대에서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뽑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각 이론들의 장단점들을 현실적인 사례들과 논쟁들을 통해 개관하고 있습니다. 
우선 아래 저자의 글을 한 번 음미를 해봤으면 하는 데요. 최근 제가 생각하는 고민과 많이 닮아 있어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370-371쪽)

본 단락에서 나타난 이 '정치'라는 낱말의 의미?때문에 한 동안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정치하면 일단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생각이 나서^^ 
아무튼 제 나름대로는 여기서의 이 정치의 의미를 '각 개인의 생각이 집약된 어떤 것(생각 또는 사상)으로 대화와 소통하기'으로 해석해 봤습니다. 요약하자면 각 개인의 생각과 사상은 다른 개인의 생각과 사상으로 어떤식으로든지 개입이 되어야 한다, 피하지 말고. 저자는 비록 개입을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된다고, 더 나아진다고 하는 보장은 없을지라도, 그것은 해보기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 보다는 뭐라도(개입을 말함) 하는 것이 더 낫다, 대략 이렇게 요약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의 생각, 의견 개진에 대한 중요성을 주장한 사상가 볼테르와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구요. 많이 알려진 얘기이긴 하지만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지요.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주장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또한, 책에서는 이 정의에 관하여 고민 거리를 하나 제공 합니다. 이 정의(justice)라는 것을 정의(definition)할 때 이런 물음들이 있다고 하는 군요.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 하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아니면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인가? 그것도 아니면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인가?
 

참 지난한 싸움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나뉘고, 좌와 우가 나뉘는 것도 어찌보면 이러한 논리구조(사상구조)하에서 이루어 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만.. 마르크스 사상까지 꺼집어 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보수(우)는 전체 즉, 100%의 사람들이 다 부유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생각과 사상의 출발을 여기서 부터 시작을 합니다. 말하자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물건이 됐든 사람이 됐든 말입니다. 반면 제가 생각하는 진보(좌)는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모습입니다. 진보 역시 대략적으로는 100%가 다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에 동조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수(우)처럼 아예 처음 부터 그 소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최대한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볼수 있을 만큼은 해야 한다는 그 정신이랄까.. 여기에 현재 제 생각도 같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은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해 볼 수 있는데 까지'이라는 기 기본적인 모토는 변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아무튼 이것도 기실 딜레마라면 딜레마인데, 샌델 교수는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에서 먼저 검토한 것이 벤담의 공리주의였다고 합니다. 이른 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대표되는 그 사상인데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음.... 말은 좋습니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행복을 갖는 다면야 물론 좋겠지요. 하지만 여기엔 전제가 깔리지 않겠습니까. 벤담은 전체라고 말하지 않았고, 단지 최대다수라고 말했으니 소수의 즉, 극빈(층)이 존재한다는 그 전제가 깔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희생양'으로 부릅니다. 벤담 사상체계에 있어서. 

벤담은 전체의 행복이 최대치가 되게 하는 것을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로 간주했습니다. 즉, 절대 다수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절대 소수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본 것이죠. 위 진보보수의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 생각의 '출발'이 여기에 있다는 데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뭐라도 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미리 안된다 생각하여 사상적으로 포기해 버리는 그 행위 말입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것도 사상이기에 그들을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겠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마누엘 칸트는 이를 맹비판 했다고 하는 군요(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1785). 벤담의 사상은 전체의 행복을 위해 소수 개인을 수단으로도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칸트는 이래서는 결코 '정의'가 될수 없다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인간 역시 수단으로 본다면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원론적인 의미의 부여 없이 그저 생각대로 일사천리 일처리?를 하면 될 것입니다. 수단이란 것은 곧 목적 또는 결과치를 최대한 높게 하는데 일조를 하면 그 뿐이니까요. 하지만 칸트의 주장처럼 인간을 그 목적으로 본다면 얘기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집니다. 인간 그 자체가 어떠한 행위의 목적인데 이를 어떻게 가벼이 볼 수 있겠습니까. 


흠.. 이런면에서 볼 때, 벤담을 자본주의로, 칸트를 사회주의 사상가로 놓아도 될까요?(한 번 찾아봐야 겠군요. 정말 이들이 이렇게 분류되고 있는지..) 

아무튼 결국 삶의 철학, 인생 철학 이런 것으로 귀결 되는 걸까요? 책에서 나온 모든 이의 생각들을 살펴볼 때 결국 한 개인의 생각과 사상에서 부터 정치든 뭐든 출발이 되는 것 같아서요. 한 개인의 특히, 가장 상위에 있는 한 개인이(대통령같은) 가지는 생각 여하에 따라 그 하부에 있는 모든 조직과 개인들이 득을 보거나 피해를 보게 되니 한 개인의 생각과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정말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공화정에서의 선거 및 투표는 대단히 중요하게 되는 것이구요.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투표를 하지 않는 행위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현실참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되고 결국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자기자신마저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철학이 죽었다 말하는 요즘, 역설적으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