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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판도라, 세월호 그리고 김선일.


영화 판도라는 다분히 세월호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 곳곳에서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숫자들과 장면들이 등장한다. 

특히 끝장면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처절한 홀로 독백장면은 영화 구성적 측면에서는 개인적으로 너무 길게 가져갔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독으로서는 원전의 위험을 관객들에게 인식시켜주기위해서, 말하자면 그 슬픔을 극대화시킬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또 다른 사람이 갑자기 생각났다. 바로 2004년 이라크저항단체에 의해 참수로 목숨을 잃은 김선일씨다. 김선일씨는 당시 우리 국민들과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게 애원하듯 얘기했다. 살고 싶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도와달라고. 

어제 판도라의 주인공도 거의 비슷하게 말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살고 싶다고.



한편, 


국가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살아간다. 세금을 내고 법망과 사회적 보장을 받는다. 외세의 침략에도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언제나 사리사욕을 일삼는 이들은 존재한다. 그들중 일부분은 완전히 이기주의적 사리사욕을 일심지만 일부는 그게 국가원영원리로써 지당하다고 말한다. 즉,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그들의 선택을 스스로 옹호한다(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더 무섭다). 


벤담과 칸트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도구화 그리고 목적화는 지난한 논쟁이다. 아마도 전자가 보수일것이고 후자가 진보일 것이다(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단 어떻게 개개인 하나를 다 보살펴서 모두 다 잘 사는 사회, 국가로 만드느냐라고 말한다면 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운영자체가 모두 인간을 도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데 핵심이 있다. 현재 2017년 12월은 거의 그렇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을 목적으로 두는 사회로 우리사회가 운영되어 왔다면 세월호나 다른 사건들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공무원들이) 생각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이었을 것이다. 즉, 좌고우면할 것이 일단 생명부터 구하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에서도 보았듯이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기반시설이나 소위 돈을 먼저 생각한다. 즉, 벤담의 주장처럼 최대다수가 행복하면 일부 소수는 불행해도 된다 혹은 불행해지는 것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벤담이 이렇게 딱 주장했는지는 확실치 않음). 


인간사회에서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금수사회다. 우리는 지금 동물사회를 지향하느냐 아니면 인간사회를 지향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