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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존페 논란.


제가 사형제를 반대하는 것은 오로지 가해자를 보호, 옹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피해자/피해자 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전혀 몰라서도 아닙니다. 사실 저는 (또는 우리는)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분)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피해자 가족과 사형수들을 직접 만나 얘기조차 못했는데 어떻게 그(분)들 심정이 이러하니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제가 사형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좁게는 나의 인권, 넓게는 우리의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국제 앰네스티 고은태 지부장이 애기했듯 사형제는 소수의 사형수들과 일반 시민 사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형제는 '국가권력과 전체시민 사이의 문제'입니다. 소설가 공지영씨도 이 비슷한 말을 했더군요. "(사형제는) 국가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다는 오만함과 후진성의 발로 이다"(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06848.html ). 사형제 존폐논란은 국가권력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권력이란, 기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2항에 나와 있는 대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내용에 부합되지가 않습니다. 국가권력은 철저히 가진 자, 힘센 자, 소수자에게 예속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형제는 이 가진자, 힘센 자, 소수자로 부터의 시민의 인권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에 대한 논의라고 봅니다.

또한, 사형제는 철저히 '극빈층'을 겨냥합니다. 사형수들의 출신이 재벌집 자식, 모 정치가 자손이란 말을 저는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사형수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반면 그들은 사형제를 '공포정치'에 적극 활용합니다. 사형제를 형벌의 정점에 올려 놓음으로써 그 이하의 형벌들을 보다 퇴색되게 만들고, 우리(국민)가 잘못 하면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감정을 사회에 퍼뜨려 놓습니다. 실제로 잘못을 저지르고 말고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 분위기를 그렇게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업체가 이기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왜 배우 김민선을 고발했는지 우리는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그 테두리가 곧 '우리의 삶과 생활의 크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혁당 사건'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을 밝혔을 뿐인데도 우리는 사형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그랬으니까요. 달리말해 우리는 지금 모두 정상인임에 동시에 잠재적 사형수들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지금 우리는 예전 만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2008년 까지는 이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의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인권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이렇게 후퇴할수도 있구나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6.15 선언 이후 이제 전쟁은 없을 거다 선포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사소한 국지전 끝에 남북전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언제나 바뀔수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의 인권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많이 추락해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방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인권은 한없이 추락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혁당 사건 처럼 죄없는 사람들이 사형제로 죽어나갈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사형제를 악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분명한 것은 그들만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사형제를 적극 활용할 것이다라는 점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기에 '인권'이라 부릅니다. 사형수에게 무슨 인권을 줍니까!라고 말하겠지만, 그리고 이것이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차별하고 제한을 두기 시작한다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우리는 차별을 두고 계급을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좀 망각하는 듯 보이는 게 있습니다. 몇 백년전만해도 우리나라에도 노비제도가 엄연히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다는 사실들 말입니다. 그때는 남자외에는 사람대접을 못 받았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삼시세끼 밥먹는 듯 당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인권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면 정말로 이것은 크고 해맑은 오산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개인주의화 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미래는 '화해와 화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 처럼, 미래는 인간과 자연, 종교와 종교, 인종과 인종간의 화합과 화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형제는 이러한 화합과 화해 시대에 반하는 제도입니다. 죽임이 죽임을 낳는 세상에서는 화합과 화해를 논할수는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이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미국의) 파시즘, (일본의) 우경화, (중국의) 세계화 전략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형제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끝으로, 예링은 그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제는 결코 평화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투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인권을 뺐아가려고 하는 세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인권의 기회를 부여 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