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가슴 아픈 이별 한 번 아니 많으면 몇 번 쯤은 해보았을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첫 이별, 앞날이 구만리 같았던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어야만 했던 이별, 그리고 가족, 친지, 존경했던 사람과의 이별 등.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은 무엇 이었던가요? 제 생각엔 이유가 없었거나 불분명 했던 이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유를 알았어도 사실, 그 아픔의 비중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문제는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그 순간이 가져다 주는 비참함에 그러한 이성적 판단은 실력 발휘를 할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현재 구제역 파동이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얼마전에 구제역 관련하여 다음 아고라에서 '구제역 살처분 축산농가의 아들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2&articleId=407560'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슬프더군요. 글쎄요... 저희 집도 약소하지만 소 몇 마리를 키우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향집에 갈 때 마다, 밥도 잘 챙겨 주지 않는 저를 보고 어색하게 반기는 그들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꽤 착잡했습니다.
작년 추수때 집에 들렀을때는 서너 마리의 소 중 한 소가 보통때는 내가 가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쓰더니 그때는 제가 머리를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신통방통했던지..
소는 개와 달라서 애교 하나 없는 정말 근엄?한 동물입니다. 머리 한 번 쓰다 덤으려 하면 금새 머리를 흔들어 버리죠. 소는 그저 눈망울이 크며 밥만 잘 챙겨주면 농사일을 묵묵히 해내는 고마운 일꾼 동물입니다. 옛날에는 농사일을 돕는 등 인간의 생업과 직접 관련이 되는 그런 동물이었죠. 지금도 물론 몸 바쳐서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 줍니다.
소는 개와 달라서 애교 하나 없는 정말 근엄?한 동물입니다. 머리 한 번 쓰다 덤으려 하면 금새 머리를 흔들어 버리죠. 소는 그저 눈망울이 크며 밥만 잘 챙겨주면 농사일을 묵묵히 해내는 고마운 일꾼 동물입니다. 옛날에는 농사일을 돕는 등 인간의 생업과 직접 관련이 되는 그런 동물이었죠. 지금도 물론 몸 바쳐서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오늘, 돼지 구제역 살처분 관련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썼는 지는 모르겠네요.
서두에서 이유없는 이별에 대해 얘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유 없는 이별을 그들(주인과 동물들)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떠나가는 이가 떠나 보내는 이에게 어떠한 이유로 이별하는 이유조차 설명 안해주기 마련인데 이번 구제역 사태에서는 살처분 당하는 소나 돼지 즉, 먼곳으로 떠나가는 이들이 그 떠나는 이유를 모른채 멀리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떠나 보내는 이들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떠나 보내야 하는지, 언제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잘) 보내 주어야 하는지... 비교적 세세하게.
떠나가야 할 이들은 그 사정을 아예 모르는데 떠나 보내야하는 이들은 마치 군대 작전 짜듯 모든 정황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언제 더 아파야 하는지 까지. 이런 경우 떠나보내는 이의 아픔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자그마치 2만두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기실 생명의 존엄 앞에 마리수 즉, '양'을 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양이 많은 것으로 생명의 존엄함을 더욱더 극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임- 솔직히 2마리라고 하는 것 보다는 2만 마리란 숫자가 더 크게 들립니다.
죽이는 시간만 자그마치 2주가 넘게 걸린다고 하네요. 생명을 살리는데 2주가 걸려도 뭐할 판에 쉬지 않고 그저 죽이는 데만 2주라고 합니다. 젠장..
전국에 걸쳐 몇 만 몇 십만 아니 몇 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지금 죽어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6.25고 홀로코스트(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고 르완다 대학살(투치족과 후투족의 싸움으로 100만여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음)입니다.
게다가 어제까지 밥 잘 주던 주인(들)이 오늘 갑자기 주사 바늘을 들이대며 말도 없이 찔러 버리니 당하는 소와 돼지들이 얼마나 황당하며 인생 황망하겠습니까.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으면 독이 들어 있다고 말이라도 해주었어야 하지 않냐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정성을 쏟는다면 그것(들)이 곧 자신의 분신이 됩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말입니다. 저는 간단하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성을 쏟은 사람을 쉬이 잊지 못하는 것과 십수년을 같이 산 애견이나 동물들이 죽을 때 다 같이 함께 우는 것 그리고 이 반지는, 이 목걸이는 누구누구의 징표라며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볼 때 마다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들의 분신들을 일에서 생활에서 여기저기에서 많이 만드는 것 그것이 곧 삶의 성공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소, 돼지 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성이 없이는 그들을 거둘 수 없었을 겁니다. 비록 소와 돼지들이 그들의 생계 즉, 돈 이었을테지만, 매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똘망똘망한 눈 앞에서는 마냥 돈으로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와 목적이 어찌되었든 생명을 거두는 일이란, 사랑없이는 절대 단 하나를 키울수도 가질수도 제대로 만질수도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두 번 다시 이런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끝을 맺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보아서는 이러한 대량생산체제의 폐해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기에 그러한 사탕발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소, 돼지 들의 명복을 빕니다.